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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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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 있는 새가 성말라 야위듯이 두루미 속의 술이 삭아서 식초가 되듯이 교도소의 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날카롭게 벼리어놓습니다. 징역을 오래 산 사람치고 감정이 날카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감정이 폭발할 듯 팽팽하게 켕겨 있을 때 벽은 이성(理性)의 편을 들기보다는 언제나 감정의 편에 섭니다. 벽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산화(酸化)해버리는 거대한 초두루미입니다. 장기수들이 벽을 무서워하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벽의 기능은 우선 그 속의 것을 한정하는 데 있습니다. 시야를 한정하고, 수족을 한정하고 사고를 한정합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넓이는 좁아지고 길이는 짧아져서 공간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결국 한 개의 점으로 수렴케 하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인 편향을 띠게 합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첨예한 감정은 이러한 편향성이 축적, 강화됨으로써 망가져버린 상태의 감정입니다. 망가져버린 상태의 감정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관계되어야 할 대립물로서의 이성과의 연동성이 파괴되고 오로지 감정이라는 외바퀴로 굴러가는 지극히 불안한 분거(奔車)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짝을 얻지 못한 불구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망가진 상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입니다. 우연히 시계를 떨어뜨려 복잡한 부속이 망가져버렸다면 시계의 망가진 상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복잡하다는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벽으로 인하여 망가진 감정을 너무나 단순하게 처리하려 드는 것을 봅니다. 감정을 이성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성에 의하여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는, 이를테면 이성이라는 포승으로 감정을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것은 대립물로서의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함으로써 야기된 오류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 합니다.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역시 감정이라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뜻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이성의 계발(啓發)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감정에 기초하고, 감정에 의존하여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벽의 속박과 한정과 단절로부터 감정을 해방하는 과제와 직결됩니다.

그러면, 절박하고 적나라한 징역현장에서 이성의 계발이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띠며, 비정한 벽 속으로부터 감정을 해방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행위를 뜻하는가. 지극히 당연한 의문에 부딪칩니다. 아마 우리는 이러한 추상적 연역에 앞서 이미 오랜 징역 경험을 통하여 그 해답을 귀납해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해답이란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한마디로 말해서 징역 속에는 풍부한 역사와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견고한 벽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각양의 세태, 각색의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모든 고통과 가난과 갈등을 인정하도록 하며,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기만을 거부케 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 즉 이성을 얻게 해줍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가슴들은 그 완급(緩急), 곡직(曲直), 광협(廣狹), 방원(方圓)으로 하여 우리를 다른 수많은 가슴들과 부딪치게 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칩거하고 있는 감정도 수많은 총중(叢中)의 한 낱에 불과하다는 개안을 얻게 하고 그 협착한 갑각(甲殼)을 벗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바다가 하늘을 비추어 그 푸름을 얻고, 세류(細流)를 마다하지 않아 그 넓음을 이룬 이치가 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산사신설(山寺新雪)이 냉기를 발하던 1, 2월 달력을 뜯어내니 복사꽃 환한 3, 4월 달력의 도림(桃林)이 앞당겨 봄을 보여줍니다. 반갑지 않은 여름 더위나 겨울 추위가 바깥보다 먼저 교도소에 찾아오는 데 비하여 봄은 좀체로 교도소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언덕과 산자락에는 벌써 포근히 봄볕 고여 있는데도 담장이 높아선가 벽이 두꺼워선가 교도소의 봄은 더디고 어렵습니다.

198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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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이 글을 읽고선 꼭 메모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실천에 옮긴다. 나와 같은 생각을 나보다 먼저 한 사람이 있어서 난 편하게 긁어오기만 했다.

"감정을 억압하기 보다는 이성을 계발하여 높은 수준의 이성에 상응하는 높은 수준의 감정으로 낮은 수준의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

요즘들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흐름으로 고민하던 나에게 참으로 시의 적절한 말이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아직 완독하진 않았지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놀라운 사색의 결과들을 읽다보면, 감옥의 벽은 수족과 사고를 한정하긴 하지만 동시에 훼방꾼이나 외부 자극을 차단하기 때문에 바깥사람들보다 더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런 사고의 기반을 갖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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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비전

스크랩북/유용 2004/06/20 00:57 |
Ricanet.com에서 순보가 퍼온걸 다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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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비전 (bin/article/Dream_Vision)

서울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 김종원 교수님의 글이라는데,
원문출처 찾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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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한 학기가 끝났다. 이제 곧 자네들은 나름대로의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학교를 떠날 것이다. 그런 자네들에게 이번 여름에는 필히 자신들의 꿈과 비전을 만들고 돌아 오라고 외치고 싶다.

자네들은 곧 이 교정을 떠나서 사회로 나갈 것이다. 대학원을 진학하든 산업체에 취직을 하든 그것은 당장 눈 앞의 진로일 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네들이 과연 20년 뒤에 자기가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일과 연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학부생들이 그러한 꿈과 비전이 없이 이 순간 그저 학기말 고사나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네들은 과연 학기말 고사 공부를 하는 정도의 시간과 노력만이라도 자네들의 꿈과 비전을 굳히기 위해서 투자를 해보았는지 잘 모르겠다. 한번만이라도 대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엔지니어 출신의 CEO가 쓴 책을 읽고 나도 20년 뒤에는 바로 이런 모습이 되고 싶다고 꿈꾸는 노력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저 이공계 기피 현상이라는 현실에 좌절하면서 20년 뒤에는 없어지겠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점점 더 포화 상태로 치닫는 경제 현실에서 아무런 꿈과 비전 없이 그저 친구들이 하는 말이나 신문에서 떠드는 피상적인 기사에 자네들의 소중한 미래를 맡기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 된다.

서울공대에 와서도 여전히 평균적인 위치의 엔지니어의 모습을 자네들의 미래의 소박한 꿈으로 삼고 나도 20년 뒤에는 혹시 회사에서 짤려나는 것은 아니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졸업을 기다리지나 않는지 걱정이 된다. 왜 자네들은 서울공대생으로서 20년 뒤에 top 1% 이내에 드는 CEO, 전문 연구직, 교수, 창업가 등을 꿈꾸지 않는가? 왜 자네들은 지금 이 순간 자네들 나름대로의 큰바위 얼굴을 그리지 않는가? 왜 사회 현상만 탓하고 있는가? 과연 자네들은 얼마나 자기 자신의 꿈과 비전을 확실히 세우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던가?

20년 뒤의 자기 자신의 모습, 즉, 꿈과 비전이 가슴 속에 확실하게 없는 상태에서 지금 죽을 힘을 다 할 수는 없다. 그러면, 결국 평균적인 위치의 엔지니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서울대를 없앤다고 난리를 쳐도 자네들은 top 1% 엔지니어가 되어 리더그룹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리더가 필요하다. 나는 자네들이 바로 이런 리더가 되기를 원하며, 그런 리더가 될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여러 번 이야기 하지만, 엔지니어로서 20년 뒤의 자네 모습으로서 결국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종류의 모습을 꿈꿀 수 있다:

- [대기업 CEO] Global top class 대기업의 CEO 또는 핵심 중역이 되어 활동한다.
- [창업가] 기술 기반의 top class의 세계적인 벤처기업을 창업하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엄청난 돈을 번다.
- [전문연구직] 세계적인 연구소에서 프로젝트 팀장으로서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 [교수] 세계적인 대학교에서 훌륭한 교수가 되어 교육과 연구에 몰두한다.
- [전문행정직] 공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top class의 변호사가 되거나 정부 관료가 되어 기술문제가 개입된 법적 소송을 처리하거나 중요한 국가 정책을 수립해서 시행한다.

여기서 제발 내가 과연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나 하는 멍청한 소리를 좀 하지 말기 바란다. 큰바위얼굴 소년은 자기가 큰바위얼굴이 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다면 도대체 자네들은 20년 뒤에 무엇이 될 것이냐고 묻고 싶다. 축구 선수는 골대가 있기 때문에 90분 동안 죽을 힘을 다해서 공을 찬다. 자네들은 A학점을 꿈꾸기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해서 시험 공부를 한다. 고등학생들은 서울대 합격하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한다.

내가 과연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은 결국 모두 다 공을 넣는 것은 아니고, 시험도 다 잘 보는 것은 아니며, 서울대말고도 다른 대학도 많은데 왜 내가 죽을 힘을 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실패를 두려워 하면 가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가야 하며, 결국 아무런 목표가 없이 살아가도 결국 20년 뒤에 어떠한 모습으로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놈의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 밖에 주지 않는다. 자네는 이런 이유로 그냥 그렇게 살다가 20년 뒤에 그냥 되는대로 살면서 그 때도 여전히 이 놈의 사회가 이래서 안 된다고 푸념할 것이냐? 그 때가서도 여전히 사회보고 책임을 지라고 할 것이냐?

위의 다섯 가지의 모습 중에서 어떠한 것도 자기 가슴에 공진과 같이 와 닿는 모습이 없으면 하루 속히 엔지니어가 아닌 다른 길로 가야 한다. 그래 다 좋다. 그런데 한 가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학기말 고사 준비하는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서 위의 다섯 가지 길을 간 사람이 쓴 책도 읽고 인터넷도 검색하고 하면서 엔지니어로서의 자네의 꿈과 비전을 만들기 위해서 손톱만큼의 노력은 해보았는지 하는 것이다.

혹시나 부모나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그저 지나가면서 던지는 그 한마디에 엔지니어로서는 나는 이런 모습이 될 것이야 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그저 언론에서 걱정하는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서 자네도 같이 걱정하며 주저앉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이공계 기피 현상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것은 자네들의 꿈과 비전이 없음이 더 걱정이다.

도대체 자네 인생은 누가 살아 주는가? 친구가, 부모가, 신문이? 도대체 자네의 꿈과 비전을 누가 만들어 주는가? 친구가, 부모가, 언론이? 꿈과 비전은 참으로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역학 문제 풀듯이 unique한 정답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제발 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서 위의 다섯 가지 길을 가고 있는 현재의 선배들이 쓴 책들을 위인전처럼 읽거나, 인터넷을 뒤지거나, 직접 인터뷰를 해서라도 그 사람들이 어떻게 각각 그 길로 갔으며, 지금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를 바란다 (첨부 목록 참조).

대기업 CEO, 창업가, 전문연구직, 교수, 전문행정가 등의 다섯 가지 모습에 대해서 적어도 각각 세 사람 정도를 정해서 철저하게 그 사람에 대해서 탐구를 해보라는 말이다. 스티브 잡스를 모르고 어떻게 창업가가 되겠다고 할 것이며, 화성 탐사선 프로젝트 팀장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르고서 어떻게 전문연구직이 되겠다고 할 것이냐? 성공한 창업가가 돈을 과연 얼마나 버는지 자세히 알고는 있느냐? 빌 게이츠가 돈 많이 버는 것은 대충은 알고 있겠지만, 그 밖의 창업가는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 알고는 있느냐?

다섯 가지 길을 간 사람들의 모습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자네들 나름대로의 20년 뒤의 모습이 그래도 더 확실하게 잡힐 것이다. 이것은 마치 5명의 여자 또는 남자 친구 후보들 중에서 누구를 마지막에 선택할 것인가 결정하는 것과 같다. 각 5명을 만나보고 이야기 해보고 해서 점점 더 잘 알수록 이 여자 또는 남자야 말로 정말로 내 친구로 삼고 싶다 하는 마음이 확실해 진다. 그런 노력도 없이 피상적인 모습만 보고 어떻게 결정을 하겠느냐? 자기 나름대로의 꿈과 비전을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절대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결정이다..

그 꿈과 비전은 가슴 벅찬 그런 것이다. 그러나, 실현하기에는 지금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아 정말로 나는 이런 굉장한 모습이 되고 싶다 하는 그런 것을 찾아야 한다. 술 먹고 방 구석에 쳐 박혀서 천장만 쳐다보면 꿈과 비전이 가슴 속에 저절로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이번 여름방학 동안에 영어 회화 공부나 해야 하겠다고 하는 계획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여름 방학 끝나고 학교로 돌아 올 때에는 이 가슴 속에 절대로 지워지지 않게 각인된 그런 꿈과 비전을 새기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런 꿈과 비전이 확실하면 2학기에는 무슨 과목을 수강할 지부터 시작해서, 군대는 언제 어떻게 가고, 대학원을 갈 것인지, 유학을 갈 것인지, 회사는 어떤 회사에 취직을 할 것인지 등등의 모든 결정이 쉬워질 것이며, 그 보다도 더 지금 이 순간 자네가 하고 있는 모든 공부와 사회활동에 대한 의미가 생기며, 비로소 고등학교 3학년 때처럼 또다시 미래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 해야 하겠다고 하는 동기가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도대체 영어 회화 공부는 왜 하려고 하는가? 토플 토익 성적 높이려고? 이런 동기로 영어 공부하는 친구도 있을 것이지만, 20년 뒤에 Global top class 대기업의 CEO로서 세계 각국에서 집결된 임원급 회의를 할 때를 위해서 영어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잘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자네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자네의 특권이다. 그런데, 서울공대생인 이상 그러한 찬란한 미래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의무 사항이기도 하다. 그것은 군대 가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게 자네들에게 지워지는 무거운 짐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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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비유학(4년)-박사후과정(1년2개월)-직장생활(3년9개월)을 마치고  


등록자 백종범 (38) 조회 3515
수학국가    미국 전공    Polymer Chemistry (고분자 화학)
등록일    2003-11-04 오후 7:13:17 삭제예정일    2004-05-31



저는 93년도 국비유학시험에 합격하여 94년 8월부터 98년 8월까지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98년 9월부터 99년 10월까지 미국소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은 후 99년 11월부터 2003년 8월까지 미국 국립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9년 수일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8월 말에 귀국하여 9월 1일부터 국내 모 국립대학에서 교편을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경험하신 것들과 제가 경험한 것과는 거의 대부분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와 보니 이미 여러분들께서 좋은 글을 많이 올려놔서 제 글이 여러분들께 특별한 도움이 되리라 곤 생각지 않습니다만, 제 기준에서 절실했던 부분만 몇 가지 글로 올리고자 합니다.

1. 유학준비

(개인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습니다) 비록 액수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저한테는 국비장학금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유학이 제게는 사치였거든요. 대학을 가는 것조차도 어려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공부 할 때는 쉽게 돈벌 수 있는 과외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대학 다니는 것은 부모의 도움이 없이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방학이면 막노동부터 학기 중 파출소에서 심야 방범대원 등으로 용돈과 학비를 벌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아껴 모아도 학비는 충분치 않아 부족한 부분은 부모님과 어렵게 살고 계시는 형제들께서 도와 주셔서 겨우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다행이 국내 대기업에 인턴사원으로 채용 되 졸업 후 입사를 조건으로 소액의(지금생각으로) 학비보조를 받았습니다. 매달 용돈으로 2만원 정도 밖에 지출 할 여력이 없던 저한테는 꽤 많은 액수였기에 적립이 가능했습니다. 대학교 4년 때 취직은 되어 있고 약간의(일 백 만원 미만) 돈은 있고 해서 이 돈으로 세상 경험이나 하자해서 왕복 비행기표 한 장 달랑 들고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여름방학 두 달 동안 개인적으로 해외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 것이 제가 계속 공부하게된 동기를 부여해 줬습니다. 왜냐고요? 모 기업회장님이 쓰신 책 중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몸으로 체험했으니까요. 하루하루 어떻게 살까 고민하기 바빠 내가 살고 있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준비해서 좀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를 해보자고 결심을 했고 준비기간을 가지기 위해 부랴부랴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다행이 제가 대학원 진학하던 바로 전해에 과외 금지가 풀렸기 때문에 조금은 여유 있게 대학원 생활과 유학준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학원 졸업하던 93년 초에 미국 몇몇 주립대학에서 입학허가는 받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그 해에 갈 수가 없었고 입학을 연기했습니다. 다행이 그 해(93년)에 국비유학시험에 합격하여 94년 여름에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2. 유학생활 (1994.8-1998.8)

약 여섯 개의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그 중에는 공부마칠 때까지 자비로 공부하겠다는 서약서를 먼저 보내와 여기에 서명하여 보내주면 I-20를 보내주겠다는 대학도 있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 주겠다는 대학은 학비가 무지 비싼 명문 사립대와 학비가 싼 주립대 두 곳이었습니다. 이 두 대학을 두고 어딜 갈까 고민을 했습니다. 비록 학비와 생활비를 학교에서 보조를 받는다고 합니다만, 국비장학금으로는 명문 사립대학이 소재한 지역에서, 현실적으로 집에서 재정보조 없이 버티기가 힘들다고 여겨졌기에 학비가 싸고 생활비가 적게드는 오하이오 소재 주립대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고 제 짐작과 주위 조언을 통해 내린 선택이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 제가 학위를 마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혹 여러분 중에 경제적 여력이 되지 않더라도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분들께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행이 입학을 하고 보니 제가 다닌 대학은 제 전공분야 특성대학으로 주변 지역에서 관련있는 군 소기업들과 주 정부 막대한 후원으로 대학원생 전원 (국비, 회사 비, 자비 관련 없이)에게 일괄적으로 학비면제와 심지어 주차비까지 학교에서 지불 할 정도로 재정적인 여력이 풍부한 대학이었습니다. 또 지도교수님께서 RA로 연간 $16000+을 지급하셔서 국비를 포함해서 연간 소득이 $30000이 넘었기에 IMF 기간에도 어려움 없이 공부에만 전념 할 수 있었고 4년 만에 무사히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4년 차에는 국비지원은 이미 끝이 났고 (3년간 지급), 학교에서 지급하는 RA와 그간 조금씩 여유 있을 때 (첫 3년간) 모은 자금도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학비(무료)이외에 4년 간 들어간 비용을 합해보면, 출국시 막 노동 등으로 저축한 돈과 친지들로부터 받은 학비보조금을 합해서 가져간 초기 정착자금 $4000을 포함해서 약 $100000+이었던 것 갔습니다. 그 사이에 처와 딸이 생겼습니다. 본국에서는 단 $1의 지원도 없었고 연로하신 (~80세) 부모님 용돈으로 $1000+를 본국에 송금한 적은 있습니다.

제 경우는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적으로 순수하게 국비에만 의존하기에는 년 간 국비지급액수가 작고 국비 지급기간(3년)이 현실적으로 학위를 취득하는데 걸리는 기간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연간 국비 지급액은 아주 학비가 저렴한 주립대 학비 충당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3년에 마치는 사람도 가끔씩 있기는 합니다만 평균 4년 이상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지급기간이 최소한 4년 이상이어야 할 것 갔습니다. 우리보다 국력이 약한 태국도 4년 간 $100000을 지급하는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15년 이전에 책정된 금액을 지급한다고 하니 너무나 현실과는 맞지 않고 국비유학이라는 의미도 상실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유학하는 동안 만난 자비유학생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액수인 것 갔습니다. 머니머니해도 Money가 걱정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인 것 갔습니다. 당국에서는 차라리 각 지역의 생활비와 각 학교의 학비를 고려해서 실비로 지원 해 주시는 것도 우수한 인력을 국가에서 양성하는 취지에서 볼때 바람직 할 것 같습니다.

3. 박사후 과정 (1998.9-1999.11)

박사후 과정은 학위를 마쳐 가는 시기에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 계시는 유명한 교수님들이나 대형연구소 연구원들과 교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실 경우 연구실적을 올리기가 용이한 반면 재정적으로 많이 어려운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본인이 장래 희망하는 직업에 따라 현명하게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보면, 1년 약간 넘게 학교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면서 카드 빛이 약 $10000까지 늘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부양해야 할 가족이 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지급하는 박사후 과정의 연봉은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보통 학교에서 지급하는 연봉은 그 지역 실정을 고려하여 혼자 살기에 충분한 비용을 지급하기 때문에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우수한 교수님과 박사후 연수 과정을 경험하고자 하는 분 중에 가족이 있는 분은 집안 혹은 국가에서 보조가 필요한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봉이 두 배 이상인 국립연구소나 기업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경험하시는 것도 재정적으로는 훨씬 유리하고 거대한 조직속에서 생활하면서 아주 폭 넓은 경험을 하기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 또한 이들이 추구하는 연구의 목표와 방향을 거시적으로 파악하기에는 최고인 것 같습니다.

4. 직장경험 (1999.12-2003.8)

다행이 제가 학위과정 중 수행한 연구분야가 미국 우주항공국(NASA) 관련분야였기에 쉽게 그곳으로부터 일자리를 제안 받았습니다. 동시에 다른 국립연구소에서도 일자리를 제안 받아 여러 여건을 종합한 후 후자를 선택해서 약 4년 간 근무하면서 박사후 과정을 학교에서 수행하면서 발생한 빛도 정리하고 여력이 있는 자금으로 조금씩 연금도 들고해서 여유 있게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에 먹고 살 만큼 연봉도 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제가 소속된 연구분야에서 연속 3년 최고 실적을 올려도 외국인인 경우에 그 실적에 상응하는 승진이나 보상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대조직에서 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여하튼 이 기간동안 거대 조직내에서 값진 많은 경험도하고 둘째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5. 귀국 (2003.8-)

귀국을 하여 일가 친지 친구들을 만나니 저더러 세상을 거꾸로 산다고들 하더군요. 요즘 교육문제로 외국이민이 유행인 시기에 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 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남의 밥에 콩이 더 커 보인다고 체험하지 않고 막연한 상상만 가지고 어떤 사회를 동경하는 것은 위험 한 것 갔습니다. 미국이 교육 선진국임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국에서 소수민족이 뿌리를 내리고 자기성찰을 원만하게 이루면서 살아가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동남아인들이 받는 설움을 생각해 보시면 다소 이해가 갈 것입니다.

6. 글 후미

제가 나고 자란(아직 부모님께서 살고계심) 산골 고향에서는 제 가방 끈이 제일 깁니다. 9년여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처음 맞는 추석에 고향을 가니 이장 님께서 산골 마을의 영광이라며 플랜카드를 걸어 주셨더군요("본동 출신 백종범의 박사학위 취득과 XX대학교 교수부임을 축하합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초등학교 (국민학교, 제가 어릴적 표현) 2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산골에서 나고 자라서 외국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을 축하 한답니다.

부족한 저에게 공부 할 기회를 준 교육부와 교육부 담당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말없이 묵묵히 내조해준 집사람과 늘 기쁨을 주는 아이들,끝없이 후원해 주신 부모님, 형제, 일가, 친지, 친구, 지도 교수님, 그리고 (미국)직장동료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출처 : http://yuhak.ied.go.kr/space/kookbi/sugi/kookbi_sugi_lis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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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보네서 퍼왔음)


나의 꿈
문병로 (서울대학교 전산과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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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창 너머 관악산의 설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멀리 산꼭대기 바위 위에 등산객 십여 명이 보인다. 주위에 사람들로 붐비던 회사를 떠나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야 하는 생활, 생각보다 잦은 회의나 행사들, 다소 늦어진 출근 시간, 3분의 2로 줄어든 월급 봉투, 공손하고 총명한 학생들, 2.14 배 늘어난 자부심:-)... LG에 근무하다가 지난 학기부터 이곳 서울대 전산과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생긴 변화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착하기 위해 지난 7 년간 무지하게도 열심히 살았다. 창현이한테 랩지에 글을 써 달라는 전화를 받고 어떠한 내용의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결국 다소 부끄럽지만 가장 손쉬운 나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나의 학부 시절을 잘 아는 친구들은 나의 지금 모습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다. 학부 시절 나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는 학생이었고 학문의 길을 가야겠다는 꿈은 아예 갖지도 않았다. 대신에 많은 과외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다소 특이한 대학 `5 년'을 보냈다. 서울대 자연대 계열로 입학한 나는 일학년 때 열심히 딴 짓을 한 덕분에 이학년 진급 때는 지금의 전산과학과에 해당하는 당시의 계산통계학과 배?ㅏ?실패하였다. 미달학과 중에 골라 배정을 받는 전형적인 코스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정 거부를 택했다. 당시 250 명의 자연대 동기들 중에 이러한 코스를 택한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4 명이었다. 이 4 명은 자연대에서도 행정적으로 항상 예외적으로 처리해야 했으므로 골치덩어리들이었다. 이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삼학년으로 진급하면서 계산통계학과에 배정을 받았다. 삼학년 초에는 재경 마산학우회장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한 달간의 선거 운동 기간을 거쳐 당선되었다. 재경마산학우회는 마산 출신으로 서울 지역에 있는 대학에 재학중인 대학생들의 총 연합회인데 2,000여 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단체였다. 과 배정 거부 때에는 물론이고 학우회장 출마를 놓고도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쓸데없이 대학생들 모임을 맡아 다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전전긍긍하셨다. 학우회 활동은 매우 바빴다. 회장이 주로 하는 일은 선배들을 찾아 다니면서 기부금을 받고 행사 준비를 하는 일이었다. 그 때 많은 선배들을 만났는데 동양나일론 배기은 사장, 나중에 정무장관이 되신 중앙일보 손주환 국장, 나중에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되시지만 당시에는 실업자였던 강삼재 의원, 한국은행 하영기 총재, 현 은행감독원장이신 이수휴 재무협력관장, 배명인 법무장관 등 줄잡아 100 분 정도는 만났던 것 같다. 매우 바쁜 분들이셨는데도 아무 약속 없이 (약속하려고 하면 안 만나줄까봐) '습격한' 동향 출신의 대학생들에게 귀중한 시간을 내어 주시고 가끔은 살아가는 얘기를 들려주기도 하셨다. 이러한 만남들로부터 학업에 대한 손해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다른 대학과 우리 학교의 단과대 동문 모임들에 체력의 한계까지 불려 다녔고 한 번 차례가 와서 노래를 하면 최소한 세 개 정도는 내리 불러야 앉곤 했다. 노래방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은 시절이었으니 노래에 마음대로 감정을 넣어 늘이고 당기고 할 수 있었다. 가사는 노래방의 화면에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끌어내었다. 참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도 선배들은 자신들이 우리만할 때는 참 낭만적이었다고 얘기했었고 우리도 같은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했으며 지금의 재학생들도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조선 시대에도 비슷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은 무지무지 무미건조해야 하는데 여전히 세상은 훈기가 넘친다. 나는 그 학기에 학우회일로 몸이 상할 정도로 바빠 한 학기를 통째로 drop해야 했고 대학을 5 년 동안 다니게 되었다.

대학의 마지막 오년차에는 과학원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다. 우리 스터디 그룹에는 현대전자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박승철 박사, 우등생이었던 퓨쳐 시스템 이사 안종길 박사, 카톨릭대 교수 박정흠 박사,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에서 연구중인 이준영 박사가 있었다. 이준영 박사는 대학원으로 가고 너머지 넷은 과학원으로 가서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싹이 노란색이던 나와 박승철은 체질에 맞게 석사 마치고 연구소로 나가고, 파란색 세 사람은 계속 박사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과학원 때도 나는 엉뚱한 일에 시간을 많이 뺏겼다. 책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깨어 있는 시간의 반은 독서로 보냈다. 전공책을 본 시간이 3 정도라면 다른 독서물에는 7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주로 700원 내외였던 문고판을 애용했다. 매달 월급 타면 서점으로 가서 책을 스무 권 정도 사도 2만원을 넘지 않았다. 홍릉 과학원 근방의 거의 모든 술집들은 돈 없이도 그냥 먹고 이름만 불러주면 외상이 되었고 월급 타면 가게들을 투어하면서 외상값을 갚는 것이 첫 번째 일이었다. 그 때 안종길이라는 천재가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은 일생의 행운이었다. 특히 흥미가 있었던 과목만 빼고는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었는데 시험 보기 이삼일 전에 그를 불러 그동안 공부한 것을 설명해 달라고 하면 이 기막힌 천재는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개념의 정의에서부터 시험을 볼 수 있는 수준까지 컴퓨터처럼 두세 시간 내에 요약을 해주었다. 과학원은 석사과정도 학점이 짠 편이었는데 그 친구가 이렇게 가르쳐준 과목은 모두 여유 있게 A를 맞았다. 나쁜 학부 성적으로 펜실바니아 주립대에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회사에서의 경력과 대학원 학점을 유지 시켜준 안 종길 박사한테 힘입은 바 크다. 과학원에서의 마지막 세 달만은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세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마침 김박사님께서 막 부임하시면서 무서운 열의를 보이시던 때라 우리는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았다.

LG 전자 중앙연구소. 서울대와 KAIST를 거친 새 연구원에 대한 부서에서의 기대는 대?洑杉? 그렇지만 나는 그 때까지 요령껏 살아왔던 탓에 손에 잡히는 컴퓨터 관련 지식 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자존심은 누구보다 강한데 실력은 없고. 극심한 스트레스??밀려 왔다. 난생 처음 거의 하루 걸러 밤새워 가면서 자존심을 손상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로 인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전철역에서 10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갈 힘이 없어서 자주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곤 해야 할 정도였다. 일 년 후 부서를 옮기게 되었는데 우리 팀장이 "무슨 일을 맡겨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말을 건너 들었을 때 다소의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연구원으로서 정착을 하기까지의 댓가는 매우 컸다. 거의 휴식이 없는 작업으로 학교 다닐 때의 강건한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자폐적인 연구원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학 시절과 과학원 시절의 내 모습을 알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연구소 생활 3 년만에 나의 사고 체계가 좀 더 체계적일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이제 나도 학문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유학을 결심했다. 집안에서는 서른 살의 나이에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장래가 불투명한 유학길을 나서는 것에 대해 반대 일색이었다. 과 배정 거부, 학우회장 출마 등을 할 때도 결심이 서면 일단 저질러놓고 보았듯이 회사에 사표를 냈다. 회사에서는 사표 수리 대신 조건 없는 장기 휴직을 제안했다. 조건 없는 장기 휴직은 당시의 LG 전자에는 없었던 제도였는데 내 건으로 처음 만들어진 제도였다. 결심만 섰지 준비는 전혀 안된 상태였으므로 1 년 동안 국비 장학생 시험, TOEFL, GRE General, GRE Subject, 미국 대학들 지원 서류 준비를 끝내었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균 두 세 팀의 과외 지도도 병행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타이트한 일정이었다. 시간이 매우 빠듯했으므로 그 1 년 동안 하나만 시험을 잘 못 본다거나 실수를 했으면 가능하지가 않은 일이었다.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지만 아플 수가 없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나는 아프다는 것은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는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비 장학금으로 경제적 부담을 다소 덜은 나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떠났다. 필라델피아에서 꼬마 비행기로 갈아 타고 펜실바니아 주립대가 있는 유니버시티 파크로 가는 길에는 끝도 없이 크고 장대한 애팔래치아 산맥이 펼쳐졌다. 그 규모에 적잖이 압도되었고 한 편으로는 나의 학문적 여정에도 이러한 스케일의 변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벼운 사슴열을 느꼈다.

꿈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은 늙기 시작한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열심히 ?梨穗?했으나 나를 흥분시키는 꿈이 없었다. 서른이 되면서야 학문의 길을 가기로 꿈??세우고 서른 하나에 미국으로 갔다. 펜실바니아 주립대에서의 첫학기에 Thang Bui라 는 교수의 Algorithm 강의를 듣게 되었다. 베트남 출신인 그는 카네기멜론 대학이 생??이래 최초로 복수 전공으로 4.0 만점에 4.0을 받은 졸업생이라고 한다. 졸업 때 총?揚?특별 축하연을 열어 주었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MIT 대학원에서 Leight on의 학문적 혈통을 이어받았고 160이 안되는 작은 키에 강의실을 울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이미 전산학과의 명강의로 소문난 그의 명성을 듣고 들어간지라 그의 작은 키 는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지적 능력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의 클래스 에서 나는 생애 최고의 한 학기를 보냈다. 깊게 생각하는 기쁨, 깊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자라고 있다는 뿌듯함은 동굴을 뛰쳐 나온 나의 결정이 옳았음을 확인시켜 주?駭? 두 번째 학기에도 그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첫 학기 만큼이나 큰 지적 성장을 이루었다. 일년 만에 나는 이제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어떠한 문제든 해결할 수 있?募?자신감이 생겼다. 그의 가이드에 따라 수행한 그래프 분할 프로젝트에서 공개 벤?「뗘?테스트를 통해 우리는 그 때까지 알려진 어떤 방법들보다도 좋은 결과를 내었고 그것이 나의 첫 논문이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도 교수와 학생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Bui가 그 곳에서 두 시간 걸리는 다른 캠퍼스로 옮기?綏?결정이 된 상태에서도 그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 해는 한국에 전화만 하면 내가 세계 기록을 깼다는 것을 자랑하기 바빴다. 두 번째 학기에는 일주일에 최소한 사흘은 두세 시간만 자고 버텼다. 낮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유학 오기 전에 약하기만 했던 나의 건강은 미국에서의 한 학기 후에는 강체로 변했다. 꿈이 하루의 생활을 이끌어가게 되니까 육체적으로 좀 무리를 해도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 아이디어는 계속 노트에 쌓이고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어디에 가건 벌여 놓은 연구의 결과가 궁금해 빨리 학교에 갈 생각만 들었다. 아내는 내가 가끔 주말에 집에 있을 때에는 학교에 가고 싶어서 안절부절을 못한다고 했다. 전형적인 일중독 증세였다. 그 즈음의 내게 일은 휴식이고 여가는 오히려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감기 몸살이 걸리어도 집에서 쉬면 낫지를 않는데 학교에 가서 일하면 깨끗이 낫곤 했다. 한 번은 동생이 한국에서 놀러 와서 집에서 다섯 시간 걸리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놀러 가게 되었는데 출발을 앞두고 갑자기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라 집에서 몇 시간 기다리게 해놓고 학교로 가 프로그램을 해서 돌려놓고 갔다. 밤 늦게 폭포 구경을 마치고 동네로 돌아오니까 아침 7시였다. 차 안에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동생이 곤히 자고 있었다. 밤새워 운전을 해서 졸음이 쏟아졌지만 전날 돌려놓은 프로그램의 결과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자고 있는 식구들을 태운 채 연구실 앞에 차를 대고 급히 들어가서 결과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동안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던 어려운 그래프들에 대해서 수십 배 좋은 결과가 거짓말같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완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첫 저널 논문이 되었고 그것이 씨앗이 되어 이후 3 개월에 한 편 꼴로 새 논문을 만들어 내었다. 입학한 지 2 년 3 개월 정도 지나니까 내가 원하는 때에 졸업해도 좋다는 지도 교수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를 만나러 포드 템포 자동차를 몰고 펜실바니아의 초원을 가로지르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 넓은 땅에 와서 아주 훌륭히 해내었다는 자부심에 달리는 차 안에서 큰 소리로 혼자 노래를 부르곤 했다. 펜실바니아 시절은 자부심, 흥분, 기대감, 장래에 대한 염려 등이 혼합된 복잡한 시절이어서 지금도 어디선가 넓은 초원을 만나거나 카펫 먼지 내음을 맡으면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마치 가랑비에 흙 젖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면 어린 시절 생각이 나듯이.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UCLA에서 post-doc으로 일하게 되었다. UCLA는 과학원에서 학문적 씨앗을 심어주신 김 진형 박사님께서 공부하신 곳이라 낯설지 않았다. 묘하게도 박사님의 지도 교수였던 Judea Pearl의 옆방에 사무실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 바로 LA로 온 사람들은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다고들 얘기하는데 펜실바니아의 시골에 살다가 LA로 간 우리 식구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매우 불친절하고 지저분한 도시였다. LA에서의 생활은 미국 교포들의 생활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많은 교포들이 미국 속에 있지만 한인 사회의 바깥에 나가면 바보가 될 정도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심지어 수십 년을 미국에 살았어도 영어를 거의 못하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닐 정도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한인들만 상대로 장사들을 하다 보니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게 되고 정직하지 못한 관행을 미국에서 재현한다. 미국의 문화를 어릴 때부터 접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2 등 국민으로 남게 되는 한계를 갖는다. Post-doc 시절에 두어 번 한국의 대학에 지원을 했는데 쓴 잔을 마셨다.

96년 LG 반도체에 복직을 하려고 임원을 만났을 때 첫 질문은 왜 학교를 가지 않고 LG로 돌아오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두어군데 학교에 지원해서 실패한 적이 있는데 같이 일할만한 대학원생이 없는 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기업체에서 연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여전히 좋은 학교라면 기업체보다 선호한다는 나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확률 게임이었다. 회사로서는 내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는 확률을 나름대로 짐작해보고 배팅을 했을 것이다. LG는 나의 은인이다. 귀국해서 고작 일 년 반 만에 학교로 옮기게 되었는데도 유학 기간까지 포함해서 12년 7개월이란 근속년수를 군말없이 고스란히 인정해 주었다. LG에서의 일 년 반동안 나는 VLSI 회로의 분할에 관하여 또 한 번 기존의 어떤 방법들보다 좋은 결과를 내는 유전 알고리즘을 개발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LG의 연구 환경에 힘입은 바 크다. 21세기를 이끌어갈 기업을 꼽는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LG를 꼽는다. 느슨한 듯이 보이는 가운데 창조적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연구 풍토를 가졌다. 지금도 나의 옛 부서에서는 체육대회나 송년회 등에 나를 실원처럼 초청해주고 나도 가끔 LG를 방문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보수로 돕고 있는데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LG에서 받은 은혜에 대한 의무에 해당한다. 나는 LG의 문화를 살아 있는 실체처럼 느끼고 있으며 내 청년기의 5 년을 알차게 채워준 LG를 위해 전도사의 역할을 자처할 것이다.

미국에서 자신만만하던 내가 post-doc 시절에 한국의 대학에 두어 번 떨어지고 나니까 다소 초조해지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오퍼를 받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니까 공정한 게임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떨어진 부분에서는 깨끗이 인정할 수 있었다. 패인은 간명했다. 저널 논문의 개수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한국에서는 (KAIST와 포항공대를 빼고는) 미국과 달리 conference 논문을 거의 평가해주지 않아 상당한 양의 conference 논문들은 거의 휴지였다. LG로 복직한 후에는 저녁 6시까지는 회사일을 하고 6시부터 10시 무렵까지는 이미 제출해 놓은 저널 논문들에 대한 빠른 회신을 독촉하고 논문을 쓰는 데 투자하여 저널 논문의 양을 늘려 시급하게 한국적인 기준을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저널의 스페셜 이슈는 경쟁은 심하지만 단시간에 논문의 수를 늘이는 데는 최고이다. 97년 초여름이 되니까 보내 놓은 저널 논문들이 여러 개 한꺼번에 게제 확정이 되면서 이제는 한국적인 기준으로도 어디에 가든 승산이 많은 이력서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었다. 상당히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실제로 이 해에 서울대 이외에도 몇 군데 더 지원을 했는데 진행 상태들로 보아 도중에 취소시키지 않았으면 모두 다 오퍼를 받을 것 같은 분위기라고 느꼈다. 내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지내는 동안 주위 사람들이 나름대로 충고들을 해 주었는데 가장 듣기 난처한 말이 내정설과 그물론이었다. 미리 짜놓고 하는 게임이라든가 평소에 다니면서 '눈도장'을 찍어 놓아야 한다는 식이 많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논문이 한 개나 스무 개나 그게 그거고 눈도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느 학교의 경우 미리 찾아가서 시간을 좀 투자해 보았는데 그렇게 불쾌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내가 찾아가는 목적 자체가 잘 보이려고 가는 것이었으므로 몸은 오그라들었고 생체 리듬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극히 조심을 하면서 한 사람을 만나고 나오면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듯 했다. 그 짓을 하며 돌아다니느니 논문을 한 편이라도 더 쓰는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학회 같은 곳에서의 자연스런 대면은 권장할만하지만 모자라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찾아 다니는 것보다 조건을 갖춘 뒤에 원서 내어놓고 대면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질적 평가 방법이 외국에 비해 다소 미흡하지만 요즈음의 학계는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사람을 뽑는다.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은 일이 곧 휴식이라서 따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다고 쓰고 있다. 내가 그의 자서전을 읽은 것은 학부 때였는데 '공부 = 고통'이었던 당시에 그것은 나에게는 꿈같이 부러운 것이었다. 동경의 강도가 높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93년 어느 봄날 펜실바니아 주립대 도서관에서 문득 10여년 전에 그렇게 부러워 마지 않던 '일이 곧 휴식'인 상태에 내가 와 있음을 발견하고는 감격스러워서 코끝이 아팠던 적이 있다. 토인비는 10 년 동안 나의 잠재 의식 속에서 나의 꿈을 돕고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는 깊은 동굴에 살면서 편안해진 나머지 한 번도 밖에 나가보지 않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관한 비유가 있다. 사람이 선택을 할 때는 위험 부담이라든지 현재의 편안함 같은 것 때문에 자꾸 지금껏 익숙한 동굴 속에 머무르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는 크게 세 번 정도 동굴을 탈출하는 모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과 배정 거부, 학우회장 출마, 유학 결심이 대표적인 나의 탈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경험들은 눈앞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나는 지름길을 택하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서 이곳까지 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 과정에 말할 수 없는 애착을 느낀다. 그렇지만 학문의 꿈을 갖고 난 서른 살부터의 지난 7 년을 다시 살 자신은 없다.

고대로부터 뉴우튼 이전까지의 근 이천 년 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하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이었다. 즉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네 원소인 흙, 물, 불, 공기는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사과의 자유낙하는 흙 성분인 사과가 고향인 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의지 때문이라는 식이다. 데카르트-뉴우튼 이후의 서구 사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에서 탈피하여 기계론적 과학관으로 옮겨 가는데 이 시기는 초기 조건에 의해 그 결과가 완벽하게 결정되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이 지배하게 된다. 뉴우튼적 세계관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주체와 객체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 객체는 주체의 상태에 관계없이 항상 독립적이고 일정한 법칙을 갖는다. 20세기 초 아인쉬타인이 절대 시공간의 개념을 깨뜨리고 하이젠베르그가 아원자 수준에서의 관찰의 객관성에 대한 물리학의 뿌리 깊은 믿음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세계관이 태동되었다. 그 때부터 현재까지 이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긴 이동 과정에 있다. 이 새로운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관찰이란 항상 주관적인 것이 된다. 독립적인 개체보다는 관계가 중요성을 갖는다. 컴퓨터 과학에서도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감지된다. 폰 노이만 머신은 뉴우튼적 세계관의 정수이다. 주체인 프로그램은 객체인 데이터를 독립적이고 결정론적으로 (deterministically) 처리한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들에서는 프로그램과 데이터의 구별이 다소 모호해진다.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유전 프로그래밍이나 스스로 그 기능을 진화시켜 가는 진화하는 하드웨어 등의 연구 분야가 대표적인 예들이다. 우리 연구실에서는 그래프 이론이나 최적화 문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요즈음 경제학, 물리학, 화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신과학 운동'과도 연관이 있다. 이제 나는 좀 더 구체적인 꿈을 하나 세운다. 사랑스러운 나의 학생들과 함께 이 새로이 열리는 세계를 제대로 탐험하고픈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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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zun 2004/04/22 03:4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몇 년 전에 쓰신거라 그런지 지금의 교수님의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그치만 참 많은걸 느끼게 하는 글이다.

  2. 2004/04/26 21: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내가 기억하는 문병로 교수님 틱한 느낌이 나는데??ㅋㅋ

  3. 2004/04/26 21: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나도 홈피에 긁어 놔야겠다.

(출처 : 네이버 지식iN)

구분과 구별 문제제기
charmdae (2003-06-09 13:10 작성)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분간한다는 뜻에서는 거의 비슷한 말이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별]

사물이 서로 같지 않음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 구분 > 보다 자유롭게 서로 다른 사물들을 분별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늘과 별을 구별하고, 사람과 귀신을 구별하며, 꿈과 현실을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러나 별을 구분하거나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서툽니다.



[구분]

한 덩어리의 사물을 체계적으로 나눌 때 구분이라고 합니다.

철학 용어로 < 구분 >은 개념을 외연적으로 나누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 관해서 말한다면 사람의 종류(인종)를 구분하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이 됩니다.

어린이들은 닭과 개/ 염소와 호랑이 등의 동물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동물들을 구분할 줄은 모를 겁니다.

약간 배운 우리들이라면 동물들을 구분할 줄도 알지요. 포유동물/ 원생동물/ 강장동물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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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zun 2004/03/06 21: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렵다... 바로 아래글 쓰다가 궁금해서 찾아본 것-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