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첫 날의 아침

여행 2012/01/26 00:21 |

'여행 첫 날의 아침'이라고 거창하게 글 제목을 써놓고 보니 참 가슴 설레는 단어들의 조합인 것 같다. '여행', '첫 날', '아침'.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의 수치를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아마 가장 높은 시간대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창 밖에서 들리는 낯선 언어의 대화소리에 잠을 깨고, 낯선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국적인 식단의 식사를 하고, 낯선 도시의 지도를 손에 들고, 지갑에는 낯선 화폐를 넣고. 그렇게 가방 구석구석 익숙치 않은 무언가들을 잔뜩 넣고서 숙소를 나설 때의 그 짜릿함이란...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 맛을 잊지 못해 결국 또 다음 여행을 계획하게 되는 것 같다.

전날 숙소에 늦게 도착해 새벽에 잠든 것 치고는 꽤 일찍 일어났다. 식당에선 사진으로 익히 보아왔던 푸짐한 조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눈치보느라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본인의 유럽하늘 아래서의 첫 식사였다). 아침식사 후기와 인증샷은 둘째날 이야기에서 쓰도록 하자. 아침 든든히 먹고, 일정 체크하고, 카메라와 여벌의 외투도 챙기고, 흐린 런던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까지 쓰고... 드디어 출발!



나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신기해서 영상을 찍어왔다.  2010년인데도 이런 엘리베이터가?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여행을 계획적으로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정해진 일정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전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정했고, 목적지로 꼽은 장소들도 불과 1~2주 전에 파악한 곳들이었다. 이렇게 여행하면 관람 대상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해서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굳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런던이라는 도시와 미리 친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마치 정말 보고 싶은 영화는 예고편조차 멀리하면서 본편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원리랄까. 절대 귀찮아서 사전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절대...

첫 목적지는 숙소에서 5분 거리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었다. 안타깝게도 미리 공부하지 못하고 갔던 점을 가장 후회했던 곳 중 하나다. 오디오 가이드를 열심히 들으면서 사원 내부를 꼼꼼하게 관람했는데, 생애 처음 방문한 유럽식 대성당(Cathedral)만 인상적이었을뿐 나머지 영국 역사와 관련된 부분은 스스로의 무지함을 일깨워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큰 여행의 즐거움으로 꼽는 사진 촬영을 못하게 했기 때문에 다소 김 빠지는 첫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실망과 좌절을 뒤로 하고 바로 옆 빅 벤을 향해 걸어갔다. 정각에 정말 Ben이 울리길래 신기해서 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문득 종소리를 신기해 하는 건 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은 민망해졌다. 시계탑의 종이 정각에 울리는 건 당연한 거잖아?





내 이상한 여행 습관중 또 한 가지는, 목적지간의 이동 수단만을 숙지해 가는 일반 여행객들과는 달리 도시 전체의 지리를 익히기 위해 혼자서 많이 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지도를 보면서 걷거나 버스를 타고 한참을 돌아다니다보면 어느새 도로와 건물들의 방향이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물론 유명 관광지를 보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길을 익히면서 낯설기만 했던 도시의 풍경들이 하나 둘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 참 좋다. 마치 그 도시에 막 이사온 사람이 도시와 서서히 친해지듯이.

호텔에서 웨스트민스터, 빅 벤을 지나 Horse Guards Parade를 구경하다보니 세인트 제임스 공원 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평일인데도 공원에 한가롭게 앉아서 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배가 고파졌... 아니, 부러워졌다. 나는 이렇게 몇 천 킬로미터를 날아와서 즐기는 여행인데 이들에겐 일상이라니. 그리고 한참 걸었으니 배가 고파질만도 했다. 커피도 고프고.



NIKON D90 | Manual | 1/100sec | F/3.5 | 0.00 EV | 18.0mm | ISO-200 | 2010:08:19 11:34:56

이 날 하는 건 다 최초다. 나의 유럽 최초 음식주문! 메뉴는?



먹을 걸 사들고 앉을 자리를 찾았는데 의외로 찾기 어려웠다. 벤치마다 책을 읽거나 쉬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비어 있는 벤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세인트 제임스 공원이 워낙 넓어서 한참 걸어가다보니 결국 앉을 곳이 나왔다. 호수를 따라 걷던 길에 어찌나 새들이 많던지... (하지만 나중에 갔던 Regent's Park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떼도 아니었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커피를 주문하려고 했는데 아직 영어가 입에 안붙었는지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격도 은근 비싸고 그래서 그냥 싸고 발음하기 쉬운 머핀이랑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머핀의 종류를 물어보는데 내가 긴장해서 못알아들었다. 지금은 익숙해진 영국식 발음도 저 당시에는 굉장히 낯설게 들렸었다. 잔돈이 동전밖에 없다고 양해를 구하는 말은 다행히 알아듣고 괜찮다고 쏘쿨하게 답해주었다.





NIKON D90 | Manual | 1/1000sec | F/3.5 | 0.00 EV | 18.0mm | ISO-200 | 2010:08:19 11:50:10

Coffee & Muffin. 동전들 때문에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나이가 스물아홉이라 그런지 그거 걸었다고 벌써 다리가 아픈 것 같았다. 호숫가 바람도 시원하고, 휴식하면서 배 좀 채우고, 산책하는 사람들 구경도 할 겸 한참을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지금 금요일 오후에 지구 반대편에서 다리 꼬고 앉아서 한가하게 머핀이나 뜯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실감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 벤치에 오랫동안 할 일 없이 앉아있었다. 먹다 남은 버핀을 새들한테 줬다가 새떼 수 십 마리가 득달같이 달려든 덕분에 내가 그 자리를 뜨기 전까지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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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송이언니 2012/01/26 10:38 Address Modify/Delete Reply

    벌써 2년전 여행후기인데 아직 첫날ㅎㅎ 마음은 그 이후로 쭈욱 유럽에 머물러있으신건가요 ^^*

    • BlogIcon zzun 2012/01/26 14:43 Address Modify/Delete

      쓰다보니 마음은 벌써 유럽으로 ㅎㅎ 얼른 마무리 짓고 또 떠나야지!

이 사진은 언제 어디서 찍은걸까? 좀 길고 지루하더라도 도착 첫 날 고생한 사연을 일단 얘기하고 싶다. 그래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결국 한 시간 늦게 밤 10시쯤 도착한 런던. 난 왜 런던 지하철은 밤새 다닐거라고 생각한걸까 자책하는 마음과, 입국심사가 까다롭다던데 오래 걸리면 노숙이라도 해야하나 걱정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나보다 앞에 있던 중국인 가족은 영어를 못하는지 매우 오랫동안 심사를 받아서 더 긴장하고 있었는데 나에겐 고작 묻는다는 게 어디를 관광할거냐였다. 도착하던 그 순간까지도 거의 무계획 상태였기 때문에 급히 생각나는 웨스트민스터를 얘기했더니 5일동안 그거 밖에 안볼거냐고 웃으며 되묻는다. 런던아이도 보고 축구도 볼거라고 했더니 좋은 여행 하라고 얘기해준다. 휴.

그때 긴장이 풀리면서 오히려 호텔까지는 무난히 도착할 수 있을거란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화근이었다. 일단 목적지까지 가는 지하철 티켓을 사고 여유롭게 탑승했다. 엄청나게 복잡한 도쿄 전철도 자유자재로 타고 다녔으니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는데 맙소사, 막차시간을 신경쓰면서 환승하다가 반대방향으로 타버렸다. 급히 내린 역에는 손님은 단 한 명도 없고 청소하는 직원 뿐이었다. 반대방향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되냐고 물어봤지만 청소원은 지하철 노선을 모른댄다. 충격.

우여곡절 끝에 반대방향 지하철을 탔지만 첫 유럽, 첫 날, 지하철 한 칸에 외국인 한 두명과 함께 타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안내방송에서 이 열차는 막차이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까지는 안간다고 하길래 다른 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내렸다. 위기의 순간이라 그런 말도 들렸나보다. 그런데 오 마이 갓, 내가 타야 할 노선이 없다. 여기 이 라인으로 갈아타려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역 바깥으로 나가서 길을 건너면 역이 보일거란다. 영국인의 환승이란 이런 것이었나? 밖을 나왔더니 어두컴컴한 밤 12시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그러고보니 런던 도착 후 처음으로 본 하늘이었다. 그 시급한 판국에 그래도 사진을 한 장 찍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웠다.

길을 건너 들어간 고풍스러운 모습의 역에서는 개찰구를 통과하기도 전에 제지당했다. 오늘 열차 운행이 끝났댄다. 웃음이 나왔다. 난 왜 런던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버스정류장이 보이길래 일단 노선도를 확인했다.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훈남이 있길래 목적지를 얘기했더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지하철역 직원에게 물어보란다. 나를 데리고 지하철역 근처까지 가서는 저기가 입구라고 알려준다. '알아요. 방금 거기서 나왔거든요.'라고 속으로 얘기하고 있으니 길을 가르쳐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그가 나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직접 겪은 첫 '서양 문화'였다.

다시 그 역으로 돌아왔더니 직원이 바뀌어 있다. 여기 어떻게 가냐고 또 물었다. 영어가 조금 입에 붙었다. 지하철은 끝났고 심야버스가 있는데 역을 끼고 돌아가면 보일거란다. 아! 심야버스가 있다고 여행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나의 첫 유럽 첫 날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있었다. 심야버스 노선도를 뚫어지게 보면서 분석(그나마 내가 잘 하는 것)한 결과 타야할 버스 번호를 알아냈다. 다행히 정류장에 사람이 많았다. 버스 도착시간이 조금 남았길래 정류장을 둘러보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한 장의 사진에 대한 스토리치고는 너무 길지만 그래도 이렇게 써 놓으니 속이 후련하다.




버스를 타고 Victoria Station을 지나 드디어 St. James's Park 근처에 도착했다. 급히 아이폰을 켜서 GPS를 확인했더니 호텔 위치가 보인다. 호텔 이정표를 발견한 순간 정말 눈물이 날 뻔 했다. 새벽 1시의 모습이라 조금 공포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사진을 한 장 찍고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름을 얘기하니까 이미 하루가 지났다고 농담을 걸어줘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나니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샤워를 하고 TV를 보면서 다음날 일정을 고민하다 보니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3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글이나 사진으로 기록해놓진 않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세세한 장면까지 기억해낼 수 있는 건 그만큼 강렬한 경험이었기 때문인듯 하다. 지금은 이렇게 장난처럼 얘기할 수 있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했었다.

'낯선 곳에 나를 온전히 던져보자'라던 여행의 목표는 그렇게 도착 3시간만에 달성해 버렸다. 그래서 목표를 조금 수정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작은 것 하나까지 가슴에 새기며 여행하자.'라고. 여행책과 지도를 덮고 모든 선택을 다음날로 미루고서는 새벽 3시에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 여행기를 자꾸 미루면서 쓰다보니 글의 성향이나 글투가 일관성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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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조나단봉 2011/02/16 00: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It's the beauty of traveling.

  2. BlogIcon 박또 2011/02/28 11:2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여행기 기다리고 있어요~ ^^

  3. BlogIcon jinto 2011/03/02 07:2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서 느껴지는 감정.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큐슈 여행기부터 잘 읽고 있습니다~ ^^

    • BlogIcon zzun 2011/03/02 18:11 Address Modify/Delete

      앗, 제 기억으론 처음보는 아이디 같은데...
      암튼 그동안 보고 계셨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올리도록 노력할게요 ㅎㅎ

  4. gods_flower 2011/06/06 01:22 Address Modify/Delete Reply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시네요 :-)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게 .... 자주자주 써주세요 ㅎㅎㅎㅎㅎㅎㅎ

    • BlogIcon zzun 2011/06/09 10:21 Address Modify/Delete

      앗 이런 누추한 곳까지.. ㅎㅎ
      자주 쓰고 싶은데 시간이 잘 안나네요.
      조만간 한 편 쓸게요!

  5. BlogIcon 조나단봉 2011/11/12 15:02 Address Modify/Delete Reply

    Your travel story is still in the first day of the trip.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란 책을 처음 만났을 때, 꼭 이 사진처럼 생긴 표지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막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날의 아침은 많이 바쁘고 정신이 없지만, 그 '설렘'은 가치를 매길 수 없을만큼 소중하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여정을 설명하는 기장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 승무원에게 짧은 영어로 부탁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창 밖으로 구름을 내려다 볼 때, 지금 내가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 일본을 두 번 다녀오긴 했지만 유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모든 문화가 다른 낯선 곳을 아무 동행도, 가이드도, 겁도 없이 혼자 열흘이나 돌아다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대신 그만큼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온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왔지만 막상 여행기를 '써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부담스러워서 그동안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4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첫 글을 쓰고 있다.

유럽을 가고자 하는 욕심으로 조금 길게 휴가를 얻은 올 여름, 내게 주어진 날은 11일이었다. 사실 한 국가도 다 둘러보기 벅찬 일정이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아쉬운 마음에 두 나라를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목적지 결정은 의외로 쉬웠는데, 우선 가장 가고 싶은 나라였던 영국이 1순위, 그리고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를 2순위로 선택했다. 2월쯤 일찌감치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잠시 귀차니즘에 빠져 있다가 5월쯤 숙소와 유로스타를 예약했다. 그때 이미 예산의 상당 부분을 지출해버린 상태였지만 '처음'이라는 설렘 때문에 돈 걱정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따뜻한 봄 날씨를 만끽할 틈도 없이 일에 치여 살다가 어영부영 다가온 8월. 떠나기 일주일 전에야 여행책을 구입하는 게으름뱅이 주제에 친구에게 '아직 계획도 못 세웠어. 어떡하지...' 라고 투정아닌 투정을 부리고 있던 나였다. 하지만 나의 무계획적인 삶이 친구에 의해 신나게 비판받고 있을 때 난 오히려 희열 혹은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다람쥐 같이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최소한의 자유는 지키고 있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자부심. 입사 후에 부족한 형편에도 매년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긴 서론은 이만 접고 여행기를 시작해야겠다. 역시 1급 귀차니스트 답게 출발 전날 밤에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해서 결국 당일 새벽 3시쯤 짐을 다 쌌다. 몇 시간 쪽잠을 자고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더니 출발 20분전이라고 뛰어가라고 승무원이 얘기해준다. 언제나 스릴 넘치는 내 인생에서 이 정도 긴장감 쯤이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게이트에 도착해 주었다. 내가 탄 케세이 퍼시픽 항공사의 비행편은 홍콩을 거쳐 런던에 저녁 9시쯤 도착하는 일정이었는데 장시간 비행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홍콩공항에서 시원한 망고주스 한 잔 마시면서 파리 여행책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시계를 보니 회사에 있었으면 점심 먹고 나서 한창 졸면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비행기로 두 시간 여를 날아왔을 뿐인데 이미 내 주변엔 한국 사람은 없고 들리는 말이라고는 영어와 중국어 밖에 없었다. 세상은 이리도 넓은데 나는 1년 365일을 그 좁은 서울에서만 살아왔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타까워졌다.

홍콩에서 런던까지 날아가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님 생각, 동생 생각, 친구들 생각, 지나간 사랑 생각,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생각... 어둡고, 춥고, 긴 터널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에 난 그렇게 한국에 두고 온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도 내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영국에 거의 도착할 때쯤 먹었던 따뜻한 컵라면이 서늘했던 내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내리기 전에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문득 지하철이 밤새도록 운행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비행기는 연착되어 밤 10시가 넘어서야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으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여행하는데 이 정도 스릴은 있어야 재밌지!

한밤중에 런던 시내를 헤맨 사연은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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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박또 2010/12/20 03:4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와우! ^^ 여행기 좋아요~

  2. 필군 2010/12/20 09:1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오오 사보에 기고하는거임?

  3. 봉이네 2011/01/20 01:1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음.... 여행기 시작을 축하해^^

    '지나간 사랑? 생각'일까? '지나간 사람? 생각'일까...갑자기 급 궁금...ㅎㅎ
    '지금 내곁에 있는 사람(들?)'에는 먼저 언급한 부모님, 동생, 친구들은 빼고란 말이지?

    담달 모임에 보여주는거야? 복수형말고 단수형이면 좋겠어.^^;; 사람들 -> 한 사람으로... ㅎㅎ

    • BlogIcon zzun 2011/01/24 10:05 Address Modify/Delete

      여행기 계속 써야하는데 왜 이리 안써질까.
      사람'들' 맞고... 친구들 생각한거야 ㅋㅋ
      난 여전히 외로운 사람이고.

      다음달에 볼 수 있으면 보자~

  4. BlogIcon 조나단봉 2011/02/15 00:4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행기에서 주는 컵라면은 늘 맛있다. 매운맛도 맛있고, 순한 맛도 맛있다.


재즈 음악에 취한 채로 글로버 가든을 나와 다시 언덕길을 내려왔다.

여행을 하면서 관광명소를 가고, 맛집을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그런 것들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잊지 못할 단 하나의 순간을 뇌리에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로버 가든의 재즈는 나에게 그런 순간이었다.





오래된 성당이 있는 곳이다보니 성물가게 비슷한 곳이 있었다.
거기서 스태인드 글래스 그림의 향초를 샀다.
어머니와 친구에게 하나씩 선물했는데 잘 쓰고 있으려나...




그리고 다시 지도를 보면서 열심히 걸었다.
난 처음 간 도시에서는 지도를 보고 걸으면서 지리를 익히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네덜란드인의 거리'라는 저 동네는 2차대전 전후로 네덜란드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 오래된 서양식 건물도 많이 보이는데 나가사키가 항구도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었다.

걷다가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서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해가 지고 있는 걸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러다 배가 고파져서 일어났다.

아, 나가사키까지 왔으면 잊지 말고 먹어야 하는 것이 있지...







바로 나가사키 짬뽕!
짬뽕이라는 음식이 탄생한 곳이 바로 나가사키다(중국이 아님).

사실 일행이 없어서 혼자 식당에 들어간다는 게 좀 부끄러웠지만
'내가 평생 나가사키를 다시 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니까 용기가 났다.

메뉴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역시 정석대로 '찬-퐁'을 시켰다.
우리나라 짬뽕과는 달리 닭뼈로 육수를 내고 맵지 않게 양념을 한다.
숙주나물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고 해산물은 조개살 정도가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흔히 먹는 일본 라멘과 우리나라 짬뽕 맛의 중간 정도?
맛은 좋았다!

장충동 족발집처럼 '원조'라고 불리는 가게가 여럿 있는 것 같았다.
저 가게도 그 중 하나.


이제 배도 부르고,
나가사키에 해야할 일도 한 가지만 남았다.








나가사키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야경으로도 유명하다.
야경을 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3층짜리 건물에 식당과 카페가 있고 사람들도 꽤 많았다.

산 중턱의 야외공연장에서 유명한 가수가 공연을 하고 있어서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그리고 8월말인데도 해가 지니까 바람이 많이 불어서 좀 춥긴 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버티면서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찍은 사진.

더 어두워졌을 때는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정말 예뻤는데...

그렇게 혼자 궁상맞게 감동하고 있다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머나먼 길을 달려 다시 후쿠오카로 돌아왔다.

사실 나가사키를 가기로 결정한 것도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니까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고생한 것도 그리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난 마지막날은 다시 후쿠오카 시내를 돌았다.
쇼핑도 좀 하고.

전에 도쿄에서 들렀던 프린팅 티셔츠를 파는 가게도 후쿠오카에 있더라고.





지하상가는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일본에서 혼자 들어가서 먹기 쉬운 것은 역시 라멘이다.
유명한 체인점(?)인 잇푸도(일풍당) 라멘.

역시나 이번에도 조금 얼큰한 라멘에 세트메뉴로 시켰더니 저렇게 나왔다.
매운 정도를 선택해서 주문할 수 있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이 여행기도 어쨌든 1년여만에 끝이 났다.
귀국하던 비행기에서 찍었던 구름을 보니 또 마음이 동한다.



북큐슈 여행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런던/파리 여행기로 커밍 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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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z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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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나가사키라는 곳을 2009년 8월에 방문했던 것이다.
여행기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어물쩡 거리다가 결국 이렇게 2010년 하고도 10월이 되어버렸네.
바다 냄새 가득했던 나가사키가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다.





이렇게 생긴 낡은 전철을 타고 도시 북쪽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었다.
무슨 성당을 갔었던 것 같은데...







맞다. 이렇게 생긴 오래된 성당도 방문했었다.
토끼 모양의 특이한 벤치도 기억나고
저 계단에서 사진 한장 찍으려고 쭈뼛쭈뼛 버티고 있던 것도 기억난다.
날씨가 정말 많이 더웠었는데...
(찾아보니 오우라 천주당인듯)




항구도시의 느낌을 아주 약간 느낄 수 있는 사진.
1년 전에 찍은 사진인데... 요즘 찍는 사진과 많이 다르네.






그리고 Glover Garden이라는 정원도 갔었구나.
글로버라는 외국인 가문(?)이 만들었다는 매우 큰 정원...
올라가는 입구가 너무 거창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그냥 부자집처럼 생겼었다.


그리고....



바로 이 곡.
공원 안에서 우연히 들었던 재즈. 'Poor Butterfly'
그 마지막 가사가 힘겨워하던 내 마음을 달래주었었다.

"But if he won't come back... then I'll never sigh or cry."

일년만에 이 노래를 다시 들으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다.
비록 리허설이었지만... 지친 여행객에게는 이 보다 좋은 선물이 있을까.




끝나지 않은 여행기는 어쨌거나 계속 이어집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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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zz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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